[기고_230726] 알고보는 정신의학 발전사5_윤형곤 가나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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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는정신의학 발전사 ⑤
윤 형 곤 │가나병원 병원장
1970년대부터 19세기 생물정신의학이 다시 무대의 중심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제2차생물정신의학의 후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신질환을 심인성으로 양육환경과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보던 정신분석적 치료가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정신분석적 치료로 무의식적 갈등과 정신질환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시 주목받게 된 제2차 생물정신의학은 유전학과 약물학을 기반으로 시작하였다. 생물정신의학은 과학적 체계와 객관적 진단방식을 갖추면서 정신질환의 원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정신질환의 원인 중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것은 지금까지는 유전적 영향에 의한 것이 유일하다. 제2차 생물정신의학은 1917년 뮌헨에 설립된 독일 정신의학연구소에서 정신질환의 원인을 밝히는 유전자연구를 시작하였다,
당시 근대의학은 질병의 상당한 원인이 유전과는 상관이 없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생물정신의학은 모종의 유전적으로 원인이 되는 부분이 있다고 보고 쌍둥이, 입양아, 가족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통계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일란성 쌍둥이는 원칙적으로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므로 둘 사이 다른 점이 있다면 환경의 영향이라고 추정할 수있었다. 입양아는 친자식과 입양한 자식의 경제적·사회적 배경 그리고 양육환경은 동일하다고 가정할 수 있었다. 입양 아이가 발병하고 그 아이의 가계에서 유병자가 있다면 유전적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부계론, 모계론, 성격 유전 등 많은 가설이 만들어지고 정치적 우파 학자가 득세하였으나 점차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유전에 관한 통계연구 결과 내려진 조심스러운 결론들은 정신질환의 유전적 영향력도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심리적 트라우마나 스트레스 등 심인성 병인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쌍둥이 유전자가 100% 일치해도 47%만 병에 걸린다는 것은 발현되지 않은 53%의 환경 영향이 있음을 가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은 특정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부정적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신질환 발생률이 높다고 해석한다. 반대로 어떤 특정 유전자는 환경의 영향을 막아준다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제2차 생물정신의학의 약물치료는 뇌의 화학적 상태, 즉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을 체계적으로 실험하면서 시작되었다. 신경전달물질을 최초로 분리한 사람은 영국 그라츠대학 약리학 교수 오토 뢰비로, 그는 1926년 아세틸콜린이 신경세포간 자극 전달을 중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당시 개발된 약물들은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하거나 진정시킬 뿐 약효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용이 편리하고 부작용도 적으면서 효과도 뚜렷한 약이 절실하였다. 1951년 프랑스 해군 외과 의사 앙리 라보리는 자기 수술환자에게 마취제로 페노티아진을 투여했는데 환자가 주변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을 보고 정신과 의사들에게 강력히 추천하였다. 페노티아진은 롱플랑 사의 화학자 폴 샤르팡티에가 합성하여 “클로르프로마진”이라 명명한 약이었다.
클로르프로마진을 눈여겨본 프랑스 정신과 의사 장 들레와 피에르 드니케르가 1952 년 의학심리학협회 10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클로르프로마진을 복용한 환자 39명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매일 클로르프로마진을 주사한 결과 대부분 증상이 좋아졌고, 의사소통도 가능해졌다. 일반적으로 매일 75~100mg이면 충분하고, 10일 안에 증상이 호전되며, 장기 입원환자 상당수가 한 달 만에 퇴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신 치료와 정신병원에서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클로르프로마진 개발을 계기로 정신 치료의 중심은 정신과 의사에서 제약회사로 이동하게 되었다.
클로르프로마진에 이어 정신의학계에 엄청난 개발과 발전이 분수처럼 이루어지게 된다. 조증환자를 위한 리튬이 개발되었고, 우울증 특효약으로 삼환계 항우울제인 이미프라민이 개발되었다. 당시 정신 약물학 연구는 학술계가 아니라 제약회사가 주도하였고,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1957년 국제신경약물학학회 초대 회장으로 산도즈 제약회사 사장 에른스트 로스린이 선출되었다. 리튬과 이미프라민 개발에 이어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분리하게 되면서 이들을 조절하는 약들도 개발되었다. 이어 정신질환이 뇌의 특정한 영역이나 특정 시스템의 결함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뇌 조직 물리적 병소를 찾아내는 학문인 신경병리학이 발전하였다. 뇌파기계를 사용하면서 신경학적 요소가 정신병리 기전을 밝히는데 상당히 응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은 약들이 개발되면서 지역사회 정신의학 이념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탈원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러 가지 약물이 도입되면서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 정확한 진단이 중요해졌다. 유감스럽게도 정신의학은 유전 요인을 빼고 나면 질병의 원인을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것이 몇 종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질병 분류는 원인보다는 증상에 따라 분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런 경우 진단이 임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진단범위도 넓어질 수 있었다. 군인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내리고, 말괄량이 삐삐를 과잉행동 주의력 결핍장애(ADHD)로 진단하며, 어느 문화권에서 진단을 내리지 않는 감정을 다른 문화권에선 우울증으로 진단 내리기도 하는 경우가 생겨난 것이다. 1940년대 미국과 영국 의사들에게 환자 영상을 보여주고 진단하는 실험을 하였다. 알코올 남용 병력이 있으며 급격한 정서변화와 함께 한쪽 팔 마비 증상이 있는 젊은 환자였다. 46명 미국 정신과 의자 중 69%가 조현병으로 진단했고, 205명의 영국 정신과 의사 중 2%만이 같은 진단을 내렸다. 이런 혼란을 처음으로 정리한 사람이 에밀 크레펠린이었다. 그는 환자의 특정 행동과 감정변화를 정리하여 공통점을 찾아 분류하였고 이를 13개 항목으로 나누어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현대 정신의학계는 약물의 정확한 투여를 위해 의사들이 적절한 검사결과를 바탕으로 증상을 정확히 표현하고 어느 기준 이상 증상이 있을 때 특정 진 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감별진단 매뉴얼을 필요로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공립수용소에 있는 정신병자를 분류하기 위한 진단분류법이 있었는데, 1948년 소소한 경증 정신질환을 포함하여 정신질환들을 포괄적으로 분류하기 위한 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1952년 미국 정신의학협회 최초 독립적 정신질환 분류체계인 ≪정 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The Diagnostic and Statistic Manual of Mental Disorders≫을 발간하게 된다.
DSM 제작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이해단체들로부터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베트남 참전 군인들 은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지지받기 위해 로비하여 왔다. 이러한 전례로 인해 정신과적 진단은 조작이 가능하다는 불명예도 안게 되었다. 1972년 진단분류학자 모임인 세인트루이스 그룹에서 혁신적인 주장이 나왔다. 의사는 자신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판단을 전문적이라고 우선해서는 안 되고, 환자 증상이 일정 기간 지속된 시점에서 특정 증상의 개수가 기준점 이상일 때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 정신과 전문의인 로버트 스피쳐는 이러한 방식으로 연구진단기준(Research diagnostic criteria, RDC)을 알리고 과학적으로나 객관성에 있어 진료적 타당성을 갖는 DSM-Ⅲ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현재 DSM-Ⅴ가 만들어지기까지 과학적 중립성을 가지고 객관화하기 위한 DSM 개편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이후 정신질환의 역치는 과거보다 상당히 낮아지고 있었고, 단순 감정적 문제도 정신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의료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신 치료가 전문화되면서 어떤 부분은 내과, 소아과, 신경과 의사의 영역으로 진료 권한이 넘어가기도 하였다. 불안증에 바륨과 알프라졸람, 우울증에 프로작이 전성시대를 맞게 되었다. 정신과 약 판매가 큰 이윤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약물치료를 확대하려는 제약회사의 경합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뿐만 아니라 임상심리사, 사회복지사, 간호사들도 개인적 스트레스를 다루면서 전문가주의 경합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51년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고객 중심 치료』를 쓸 때는 심리검사 위주로 하던 심리학자들이 한창 정신 치료하고 있었다.
정신 약물이 쏟아져 나오고 진단체계가 확립되면서 의사와 환자 간 상담 시간은 줄 어들고 있었고, 환자의 요구가 무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60년대 반정신의학운동이 일어났다. 반정신의학을 대표하는 저서들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1961), 어빙 고프만의 『수용소』(1961), 토마스 사츠의 『정신질환의 신화』(1960) 등이 있다. 그리고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62)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들 작품의 메시지는 정신과 환자는 아픈 사람이 아니고 일탈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학자 토마스 쉐프는 정신질환자 낙인이론(1966)에서 정신질환자의 내적 정신상태보다는 사회적 반응이 정신질환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결정인자로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당시 진보 단체나 학생들에게 많이 보급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실제 정신과적으로 고통 받는 환자나 가족들에게 있어선 반정신의학에 대한 강한 불쾌감과 저항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에는 정신과를 방문하는 환자들이 예외 없이 늘어나고 있고, 정신질환을 일상 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신의학이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분야라는 것은 정신과 임상기예의 본질임이 틀림없다. 1960년대 초반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던 에런 벡은 환자들이 자기 자신, 세상,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결론을 자동으로 떠올리고 있다는 것(automatic thought)을 발견하였고, 이런 왜곡된 생각과 습관에 인지치료가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불안장애, 강박증 등도 인지치료로 교정하면 정서와 행동에 모두 호전을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타 진료과들은 진료가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정신과는 치료와 상담에 더 긴 시간을 요구한다. 정신 치료에서 약물치료에 따른 생물학적 증상개선과 인지치료를 병합해서 한다면 뇌와 마음을 치료하는 데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때 정신과 의사에 대한 사회의 믿음은 더욱 커질 것이고 정신의학이 기여할 방향은 더 명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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