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230726] 알고보는 정신의학 발전사4_윤형곤 가나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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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는 정신의학 발전사 ④
윤 형 곤 │가나병원 병원장
20세기 초반 정신의학 무게의 중심은 정신병원에 있었으나 약물치료로 개선할 수 있는 선명한 치료적 방법이 개발되지는 않고 있었다. 한편 정신분석이 정신적 성찰 욕구를 채워 주기는 하였으나 정신질환 치료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 정신병원은 최신식 실험 실과 잘 갖춘 도서실을 갖추고 있었고, 위생시설도 향상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정신병원 의사들이 요구하는 치료 욕구를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 열 치료
1883년 빈의 정신과 의사 율리우스 바그너-야우레크는 정신병원 수련의로 있으면서 어느 여자 환자가 연쇄구균 감염 이후 정신병 증상이 완화되는 사례를 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열과 광기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의도적으로 말라리아 병균을 주사하는 다소 황당한 실험을 하였다. 그의 열 치료는 실제 말기 신경매독 치료에 가시적인 효과가 있었고 그는 192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열 치료는 절차가 까다로웠고, 비용도 많이 들었으며, 고열과 오한을 일으키는 감염 혈액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열 치료는 치료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정신병을 치료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정신 약물
고대부터 몸속 독소가 광기를 일으킨다는 관념이 내려왔고 설사제로 광기를 치료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고 근대 이전까지는 미나리아재비 풀이나 베라트룸 비리데 등 약초가 심장박동을 느리게 하고 구토를 유발하여 광기를 제거한다고 보았다. 근대 이후에는 약초 대신 알칼로이드(질소 함유 약초 추출물)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 성분 중 대표적인 것이 모르핀이다. 1868년에는 환각제 성분으로 잘 알려진 히오시아민이 진정 및 수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880년 히오시아민에서 히오신이 분리되어 수용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 시기부터 바이엘과 같은 독일 제약회사들은 본격적으로 약을 화학적으로 합성하여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우울증 환자의 불면과 불안을 해결해 주는 클로랄과 모르핀 알칼로이드로 강한 구토를 유발하는 조증 치료제 아포모르핀도 개발되었다. 하지만 이런 약들은 잠시 동안만 정신증을 억제할 수 있었을 뿐 근본적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 수면요법
한편 정신증을 잠시 동안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완치할 수 있다는 희망도 품게 되었다. 1857년 런던 내과 의사 찰스 러컥이 여자 히스테리성 간질 환자에게 브로민을 투여한 결과가 긍정적이었음을 발표하면서 브로민이 공식 진정제 목록에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브로민 추출물인 브로마이드는 수면요법에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897년 닐 맥리 오드는 일본 어느 호텔에서 급성 조증으로 진전된 48세 부인을 상하이로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브로마이드로 수면 치료를 하였다. 일본에서 상하이까지 배에서 긴 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 부인은 깨어나자마자 정신질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짧은 시간 진정시키는 과거 요법과는 달리 장시간 수면 약물로 정신병을 근본적으로 완치하기 위한 물리적 방법이 고안되기 시작하였다. 1903년 독일 화학자 에밀 피셔는 연장 수면 치료 진정제를 개발하였고 여자 친구 이름 바바라를 본떠 바르비투르산이라 명명하였다, 바이엘사는 이 약을 베로날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였고, 쉐링사는 메디날이라는 상품명으로 판매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정신의학계 전반에 수면과 혼수와 관련하여 뇌를 설명하려는 분위기가 확산하였고 정신병을 완치할 수 있다는 희망도 품게 되었다.
◆ 인슐린 혼수 요법 및 경련 요법
1920년대 말 유대인 만프레드 샤켈은 1922년에 인슐린 호르몬을 극소량만 투여해도 모르핀을 갈망하지 않게 되고, 당뇨뿐만 아니라 우울증까지 치료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슐린성 혼수(저혈당성 쇼크)에 빠지면 그 자체로 주요 정신질환이 치료되었다는 것이다. 인슐린 혼수는 경련과 발작이 있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유대인 신분이라 유럽에서 활동에 제약받았던 샤켈은 미국으로 건너가 인슐린 혼수 요법을 보급하면서 유행하였다.
한편 인슐린 혼수 요법에 이어 경련 요법 도 시작되었다. 경련 요법은 메트라졸을 투여하여 혼수에 빠뜨리지 않고 경련발작을 유도하여 증상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1934년 헝가리 출신 러디슐러시 J. 메두너는 뇌 전증과 조현병 간의 역상관관계에 주목하였고, 조현병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뇌에 쇼크를 주는 것이 조현병 환자의 증상을 완화하고 우울증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인슐린 혼수 요법보다 치료 효과가 높다고 보아 본격적으로 경련 요법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경련 요법도 치료 고통이 훨씬 줄어든 전기충격요법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 전기충격요법
1938년 로마 대학 정신과의 우고 첼레티와 루치오 비니는 뇌에 전기적 자극을 주어 뇌전증을 유발하는 전기충격요법(Electroconvulsive therapy, ECT)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뇌에 전기자극을 주어 경련발작을 일으키는 전기치료가 어떻게 효과가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정신분석보다는 효과가 훨씬 좋았고, 주요 우울증 치료 결과가 긍정적임을 경험적으로 입증하였다. ECT는 조현병의 완치법은 아니었지만 증상을 완화하고 기능을 회복하는데 다소 도움을 주었다. 당시 수용소 정신과 의사들의 큰 환영을 받았는데 즉각적으로 의식을 잃게 하고, 공포감도 느껴지지 않으며, 경련 후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메트라졸 주사를 놓으려 환자를 쫓아다녀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ECT가 가진 실제적 위험도 있었다. 환자가 치료대 위에서 몸부림을 치면 팔다리 또는 척추 골절이 일어날 위험이 컸다. 그런데도 1950년대엔 이런 부작용에 대한 치료법도 개발되면서 조울증과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단기간 수면 유도를 하고 근육을 이완시켜 몸 일부에서만 경련을 일으키도록 하여 1980년대엔 선택적 치료로 효과를 인정받게 되었다. 19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듀카키스의 부인 키니 듀카키스가 우울증 치료로 ECT를 받고 나서 정치인으로서의 리더십을 회복하였고, 헤밍웨이도 우울증 치료로 ECT를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보편적 치료로 알려지게 되었다.
◆ 뇌엽절제술
중세엔 광인 머릿속에 돌이 있어 이것을 덜어내면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근대 의사들도 강박 행동을 초래하는 신경로를 절단하거나 악성 단백질 생성 부위를 제거하는 뇌수술을 하면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뇌엽절제술 역사는 1860년대 스위스 고틀리프 부르크하르트가 시작하였다. 1935년 예일대학 신경학자 존 풀 턴은 전두엽 신경을 절제한 침팬지 두 마리의 행동과 지적능력 변화를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를 읽은 포르투갈 신경과 의사 안토니우 에가스 모니스는 1935년 11월 리스본 산타 마르타 병원에서 외과의사 페드로 알메이다 리마와 처음으로 전두엽 절제술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치료법은 획기적인 것으로 인정받아 1949년 모니스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46년 미국 워싱턴 신경정신과 월터 프 리먼이 횡안와(橫眼窩) 뇌엽절제술을 개발하였다. 안구 천정을 통해 뇌에 기구를 찔러 넣어 뇌를 절제하는 기법이었다. 당시 뇌엽 절제술 유행은 절정에 달하였는데 1941년 케네디 대통령 누이 로즈메리 케네디도 치료받을 정도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늘어나는 정신질환 환자에 대해 재정적 부담과 병상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였다. 뇌엽절제술은 광폭한 환자를 진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 판단력과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게 했고, 사회적 감각도 둔해지게 되었다. 뇌엽절제술은 1940년대까지는 어떠한 치료로도 도움을 받지 못했던 환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은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치료 효과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수술로 인해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오명을 남긴 치료법으로 기록되어 1950년대에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 지역사회 정신의학
영국에서는 몸을 물리적으로 다루는 방식보다 치료 환경을 조성하여 정신 치료를 하는 지역사회 정신의학(또는 사회정신의학)이 생겨났다. 정신병은 잘못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집단치료의 방식으로 건강한 인간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지역사회 정신 치료 방식은 환자가 자발적으로 입원하고 자기 의지에 따라 퇴원하는 개방형 수용소 방식과 환자를 퇴원시켜 가족형 돌봄 형태로 치료하는 방식이 있었다. 1920년대 중반 중앙유럽의 정신병원은 외래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지역사회 정신의학을 결정적으로 보급한 사람은 1938년 나치를 피해 빈을 탈 출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 조슈아 비어러이다. 아들러에게서 수학한 그는 런던 근교에 전임의사도 몇 명 없는 런웰 병원에서 정신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는 개인 정신 치료는 환자를 분석가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치료를 지연시킨다고 믿었다. 그래서 환자를 독립적 이고 적극적이며 자기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도록 하여 통찰력도 갖고 정신증도 완치하도록 하는 공동체 치료방식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낮에 입원하고 오후에 귀가하는 낮병동도 운영하였다. 미국은 1963년 정신건강 법령을 제정하여 지역사회 정신의학을 보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수용소 환자를 대책 없이 사회로 내보내 거친 세상 풍파에 내 던지기만 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보다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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