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_230726] 알고보는 정신의학 발전사2_윤형곤 가나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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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는 정신의학 발전사 ②
윤 형 곤 │가나병원 병원장
19세기 정신과 의사 중에 수용소에서 근무하지 않는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과학에 관심 을 가지면서 1세대 생물정신의학의 전통을 세운다. 이들은 정신질환에서 마음과 뇌의 연 관관계를 드러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려고 하였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정신질환은 운 명이 아니라 뇌의 질병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이 시기 수용소와 대학에서는 정신 질환을 연구하는 데 보다 과학적이고 임상병리적인 방법을 적용하였고, 대학에서 정신의학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특히 독일은 많은 수용소와 대학에서 국가의 지원 아래 교육과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였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결실 맺도록 하여 정신 의학을 선도하였다. 독일의 1세대 생물정신의학 창시자인 빌헬름 그리징거는 내과와 정신과 교수를 번갈아 하면서 종합병원에서 정신질환치료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 마이네르트는 뇌를 현미경으로 분석함으로써 정신질환의 근저에 있는 해부학적 원인을 이해하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카를 베르니케는 특정 증상군을 뇌의 특 정 부위와 연관시키는 연구를 하여 베르니케 실어증으로 부르는 특정 유형의 언어장 애 영역을 발견하였다. 여기서 언급해둘 것 은 당시 독일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정신 질환은 치유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교수들 은 기초과학에만 관심을 가지고 환자의 정신적 고통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종말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 하게 된다. 당시 진찰하는 의사들은 병을 자기가 생 각하는 이론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1800년대 초반까지의 유럽과 미국 정신의학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한 사람이 독일의 에밀 크레펠린이다. 1878년 의사가 된 에밀 크레펠린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뇌 해부학보다 근대 심리학의 아 버지인 빌헬름 분트의 심리학에 더 관심을 가졌다. 1890년 하이델베르그대 교수가 되면서 크레펠린은 환자마다 카드를 만들어 병력, 입원 시 증상, 퇴원 당 시 상태 등을 기록하고, 이후 질병 변화에 관한 내용 을 진단 상자에 적어 넣어두었다. 지금은 의사가 의무기록지에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는 새로운 시도였다. 크레펠린의 주안점은 뇌의 이상,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신경해부학적 변화를 보면서 질 병의 원인을 밝히는 게 아니라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질병 추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정신질환을 분류하고, 정신질환의 귀추를 보면서 감별하고 총람 하는 체계를 만 들어 정확한 진단이 내려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크레펠린은 의사가 자신이 가진 기존 이론 에 끼워서 맞추거나 해석하려 하면서 잘못된 진단이 내려진다고 보았다. 크레펠린은 당시 유전학이나 뇌 생물학 수준으로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원인에 따라 진 단명을 분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신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 분류만 잘해도 정 확히 진단하고 질병의 예후를 충분히 밝힐 수 있다고 보았다. 크레펠린에 의해 누구나 똑 같이 관찰하면 똑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되면서 정신의학은 비로소 의학적 모델로 설 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초적 자료는 오늘날 정신과 의사들에게 권위적 지침이 되 는 국제질병분류(ICD)와 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요람(DSM)의 질병분류 근거가 되었다.
한편 1860년 이후 퇴행이라는 단어가 회자하면서 정신질환은 퇴행성 질환이고 유전으로 대를 거듭할수록 정신질환자가 늘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정신질환자는 수용소에서 치료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 친밀한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20세기 초 수용소가 아닌 개인 의원에서 정신과 환자를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계기가 신경성 질환이라는 개념이다. 인체 기관 중 “신경”이라는 부분에 질환이 있다는 말은 광기라는 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수용소라는 폐쇄적 공간을 벗어 나 대중과 소통하고 중류층 환자를 수월하게 상대 할 기회가 되었다. 뇌 질환인 기질성 질병, 뇌의 질 병, 생물학, 체질 등을 뜻할 때도 모두 신경질환이라 하였고, 환자에게는 유전이나 퇴행 증상이 아니라 는 안도감을 주었다.
정신과적 문제를 신경적 문제로 해석하기 시작 하면서 수(水)치료가 유행하였다. 정신과와 온천 사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깊은 상관관계가 있었다. 고대로 물은 그 자체로 치료 효과가 있다고 믿어왔다. 무기질 온천의 입자 성분은 변비를 치료하고, 요오드나 철이 다량 함유된 온천은 이런 성분의 결핍자들을 치유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해서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간 수치료는 불안, 불면, 두통, 예민함 등 정신질환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다. 파 리 남쪽 406km떨어진 비시온천에는 러시아 귀족 부인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근대식 정신병원이 생기기 전까지 의사들은 온천을 상업적 요구에 맞춰 운영하였다. 일반 대중과 중류층을 위한 수치료 클리닉 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수용소 정신질환자들은 온천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이 시기 중증질환도 개인 클리닉에서 치료가 이루어지면서 기질성 질환을 신경성 질환 인 것으로 설명해줄 용어가 필요했다. 이것을 해결해준 것이 신경쇠약이라는 질환이다. 18 세기부터 정신 신체적 증상(psychosomaticsymptom)이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 면 막연히 여성은 히스테리아, 남성은 건강염려증 진단을 내렸다. 그 외 우울, 강박적 행동, 불안 등은 “신경성” 질환으로 통칭했다. 1860년 이후에는 히스테리아를 다발성 경화증과 구분하고, 진전마비를 건강염려증과 구별하는 진단 방법이 개발되었다.
이때 1869년 뉴욕 전기치료사 조지 비어드(1839~1883)는 신경쇠약(neurasthenia)을 뚜렷한 실체를 가진 질병이라 선언함으로써 정신증도 신경 문제로 해결하였다. 비어드는 신경성 증상 중 많은 부분은 신경이 물리적으로 소모되어 생기는 신경의 쇠약으로 인해 생긴다고 보았다. 환자는 실제 고통을 느끼기에 현실적 문제임엔 틀림없으나 신경의 물리적 소모는 현미경으로 볼 수 없기에 신경쇠약이 기능성 신경질환의 원형이 된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소화불량 두통, 마비, 불편, 감각 이상, 신경통, 류머티즘, 월경 불규칙 등 모든 증상이 신 경쇠약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빠른 도시화가 진행되던 미국 정서에 부합하여 “난 신경쇠약이야”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졌다.
땅이 넓어 이동이 쉽지 않은 미국에서는 온천이 아닌 휴식을 기반으로 한 치료를 연구 하기 시작하였다. 지친 신경을 위해 “휴식치료”라는 치료법이 개발되어 정신의학의 주요 무대에 올라온다. 휴식치료는 미국 신경의사 사일러스 위어 미첼(1829~1914)이 개발한 것으로 신경쇠약이라는 용어에 무게를 더해준 치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누워있게 하였고, 가족도 만나지 못하도록 격리하여 절대 안정을 취하도록 하였으며, 적정한 음 식과 마사지를 제공하였다. 아무것도 안 하기와 적극적 휴식은 효과적 처방일 수도 있지만 과학적 처방이라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개인 클리닉이 늘어났고 의사들이 환자의 요구에 더욱 경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와 순응이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경증이 개인 심리적 문제에 기반하 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암시, 최면, 정신분석과 같은 상담기법이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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